절정의 순간을 컷! – 컷, 그리고 절정, 결말 없는 이야기
# 고장 난 기억
기억나는 것이 없다. 뒤죽박죽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와 같은 혼란 속에서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또 어떤 결말을 맞이 했는지 조차 기억할 수 없다. 기억할 수 있는 건 단지 클라이맥스 뿐. 극적인 감정들의 장면이 뇌를 한 방 맞은 것처럼 사고회로를 고장 나게 만든다. 선형적 시간 감각은, 충격적인 감정 앞에 무너진다. 시간은 파편화되고, 장면은 그 절정에서 멈춘 채, 다음 컷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 단절은, 무언가 잃어버린 것을 되짚으려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 지금 여기, 그리고 혼란
결국 나는 조각나고 왜곡된 기억들과 감정들의 집합 속에서 하루를 되돌아본다. 여전히 제대로 기억나는 것은 없다. 기억은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감정을 과장하거나 생략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명확한 서사 구조를 들이밀 수 없다. 선명하지 않은 장면들 속에서, 나는 충격과 혼란에 붙잡혀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감정들이 오히려 나를 붙잡는다. 이것은 끝나지 않은 감정이며, 여전히 현재형으로 지속되고 있다. 이는 단지 과거의 잔상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나의 시선과 맞닿아 있다.
# 결말 없는 만화
작업 속 장면은 특정한 방향이나 결말 없이 전개된다. 통상적으로 구조화되지 않는 전개 방식은, 나의 기억 회로가 작동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그러나 최대한 더듬거리며 이야기 한다.
나의 작업은 조각난 장면들의 나열이며, 마치 찢겨진 만화책의 한 페이지와 닮아 있다. 캔버스 위에는 한 화면에 여러 컷들이 등장하고, 이들은 물리적 대비와 색상 강도, 재료의 차이를 통해 충돌하거나 교차한다. 주로 강한 원색 위주의 유화를 사용하지만, 그와 대조되는 무채색의 연필, 펜, 목탄과 같은 건식 재료들도 병치된다.
이질적인 재료의 병치는 시각적 충돌을 유도하고, 구상적인 대상 —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화된 인물들 — 은 일종의 감정 기호로서 기능한다. 반면, 이들과 병치된 추상적인 붓질은 구체적인 형상을 지우고, 물감의 물성과 농도, 질감을 통해 감정의 밀도를 전한다.
이러한 구성은 전체적으로 통제된 정서가 아닌, 자극적이고 불안정하며 혼란스러운 감정 상태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래서 작업은 언제나 ‘절정’에서 멈추고, 서사는 연결되지 않으며, 결말은 유예된다. 나는 그 지점에서 계속 머문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어쩌면 끝낼 수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